top of page

나의 빈약한 삶은 하루하루 연명되는 와중에도 절대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다. 몇 가지는 상대적이고 몇 가지는 절대적이며 마치 내가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진 것 마냥 절대 나를 놓지 않았다. 내가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도록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그들은 그렇기에 무척이나 지독하고 악독한 성질의 것들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얼른 손을 털어버리고자 했을 때도 사라지지 않고 제 자리를 필사적으로 지켰다. 따라서 나는, 그렇기에 그 희미한 이변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너는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메마른 나의 삶을 잔잔히 적셔갔다. 작은 자갈 틈도 메꾸는 물방울처럼 너는 내 마음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제자를 이끈 예수와 같이 너는 저 먼 이상의 그것에 나를 이끌어 단물을 마시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네게 책임을 묻는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묻는다.

 

7월. 장마가 시작되는 우중충하고 습한 계절, 나는 너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연애에 단 한 번도 진지해져본 적이 없었기에 네 앞에서 했던 진중한 고백은 말하자면 일종의 첫 경험으로,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사랑 고백은 지금도 내 낯을 뜨겁게 만들었다. 평소 입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고 네 앞에서 서성였고, 유독 머리칼을 자주 매만졌으며 흐르지 않는 시간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기에 설레었던 그 순간을 회상한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과 습한 공기가 촉각을 통해 어렴풋이 느껴진다. 감히 시선을 맞추지 못해서 바라보았던 저 멀리의 아스팔트에는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내 마음이 식도든 기도든 무엇을 타고 넘어와 혀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기에, 네게 주제넘은 사람이라고 평생 비웃음을 산다 해도 그 또한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생각해 감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때 이른 더위가 부린 마법일까. 너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것이 너의 실수라고 이 순간 단언한다.

 

그 해 12월. 처음으로 포근한 겨울을 알게 됐다. 다시는 겪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주변인들은 간혹 우리를 의아한 눈으로 흘겨 보았었다. 우리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던 것이 그리 신기했을까. 이유가 너무 뻔해 우리는 그저 눈을 마주치며 천진하게 웃었다. 우리가 잘 통해서 그렇지. 히히. 너와 나는 알고있었다.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맞췄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 앞에 배를 까고 드러누워 쓰다듬어줄 손길을 기다렸고 네가 목줄을 채우도록 직접 그것을 물고 너에게 다가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복종하는 개와 같았고 순종하는 양과 같았다. 나의 털과 가죽을, 살과 내장을 모두 내줄 수 있었던 가축. 부담스러운지 곤혹스럽게 웃던 너는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난 기꺼이 그렇게 비굴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제쳐둔 채 내 사랑을 서툴지만 이뤄가며 행복했다.

 

감격했다. 너를 사랑하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루하루 경탄하며 신께 감사했다. 처음 느껴본 벅찬 감정은 그 존재만으로 내개 삶의 이유가 되어 나를 유지했고, 내 존재의 근원이 되어 생에 감사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했다. 분에 넘쳤다. 이것은 즉, 너는 나로 인해 삶의 일부를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라. 잠시나마 내가 꿈을 꾸도록 네 시간과 감정에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내 주제에 걸맞지 않은 지나친 행운은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때론 네 옆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쳐 스러지곤 했다. 더 잘 해줘야 하는데. 네가 나와 있는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치 있다 여기게 해줘야 할 텐데. 내 노력이 모두 네게 닿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혹은 어쩌면, 지나치게 닿아서였는지도 모르지.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너의 태도는 상처보단 의아함만을 남겼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 끝을 두려워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으로 이루어진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고통스럽기 그지없더라도 또한 나를 관통하는 행복에 결국 실낱같은 쾌락을 원동력 삼아 다음 발을 내딛는다. 한걸음 한걸음 상처 입어가며 너의 주위를 맴돈다. 그것은 죄의 굴레와 같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동시에, 나만 여기에 남겨둔 채 너는 훌쩍 더 아름답고 깨끗한 곳으로 떠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네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던 날. 너는 나의 신으로 자리해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를 다른 곳으로 넘어뜨렸다. 그곳이 날카로운 자갈들 위인지 부드러운 모래 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하나. 그때부터 나는 내리막에 올라섰음을.

 

너와 함께하는 동안 난 하루도 빠짐없이 네가 떠나가는 꿈을 꿨다. 나를 바라보는 감격스러울 만치 따듯했던 그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는 순간의 공포. 네게 멸시받고 미움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끔찍한 가정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고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기 위한 목소리 한 움큼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바닥조차 없는 저 무저갱에 가라앉고 너는 내 마음에 불을 지른다. 네가 가는 길엔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 너의 앞날을 비추고, 나는 그 뒤 비참한 음지에 남아 고통과 공포에 절여진 초라한 모습으로 어둠에 잠겨 그렇게 저 너머 어딘가로 사라진다.

 

아니.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네가 주인공인 나의 삶의 극에서 나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결국 주체로서 남겨지는 것은 나다. 나는 여전히 여기서 고통받는다. 너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이제 내게 값을 치루라 말한다. 내 손에 쥐고 있던 그 악독한 것들이 나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악취를 그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지 않냐. 그는 떠나갔지만 너는 그에게 적어도 아름답게 남을 수 있지 않느냐. 더 고통받고 더 비참해도 좋을 너에게 넘치는 행복을 손에 쥐게 해주지 않았느냐. 나는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남겨진 채 벌을 받는다. 그들은 납득할 수 있는 죄목으로 평생의 형량을 내게 치루라 말했다. 나는 마치 늙은 노인처럼 너와 함께했던 그 짧은 순간으로 갈증을 채우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한번 맛본 단물을 잊기에 인간은 지나치게 탐욕적이다. 내 것이 될 수 없기에 그리 달았던가. 다시금 나에게 그 생기를 흘려줄 사람을 찾아보려 해도 그러기 위해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이다.

 

네가 떠나가고 나서야 너와 함께했던 꿈을 꾼다. 미련하게도.

욕심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