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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앉은 듯이 무거웠다. 아니,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덩어리진 것에 가까웠다. 나는 한 번도 물 표면으로 떠올라본 적이 없으니 태어난 그 직후부터 지금까지 물 아래에 앙금이 생기듯 침전된 것뿐이다. 그것이 이어져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밀려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아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짓누르는 수압에 눈을 무겁게 감았다 뜨자 손에 익숙한 침대의 푹신함이 닿았고, 달갑지 않은 햇살이 눈에 파고들었다.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면 자정이 되기 조금 직전일 텐데 무슨 일인지 살갗을 파고드는 것은 밤의 가로등 빛도 아니었고, 아침의 설익은 빛도 아니었다. 그 빛은 오후의 쨍하고 뜨거운, 그런 빛이었다.

 

 

- 똑똑

“들어와.”

 

 문 너머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가슴께 조금 아래로 옷자락을 따라 천 조각을 쓸어내리는 머리카락과 네가 쉬는 날이면 입고 있던 파자마 원피스가 눈에 익었다. 등 뒤로 비치는 빛 때문인지 네 머리카락은 오렌지 빛을 띄우고 있다. 그 오후와도 같은 빛에 눈이 쓰라렸다. 무슨 일이야? 내 질문에 –표정도 보여주지 않은- 너는 그저 익숙한 울림으로 오랜만에 체스 한 판 할래요? 라는 질문으로 맞받았다. 간간히 있었던 일이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네 모습이 아지랑이만치 번져보였다. 그 이유는, 네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의 딱 그 때의 나이대로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이 내 오피스텔이 아닌, 같이 살던 집의 내 방이라서 일까. 그렇다면 이곳은 꿈인 걸까. 정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고장 난 만년필로 쓴 편지처럼 이곳저곳 번져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낙서와도 다름없는 종이로 전락했다. 그런 내게 쓸데없는 생각을 치워버리듯 네가 네 몸 크기와도 엇비슷한 체스 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철 조각으로 고정된 이음매가 탁자 바닥을 쓸어내리며 날카롭게 긁어내었다. 지금 저 체스 판을 들어 올리면 지금 생긴 것과 더욱 묵은 생채기들이 누군가 구겨놓은 자국처럼 탁자 위에 눌러 붙어있을 것이었다.

 

“좀 봐주면서 하라니까.”

“이런, 게임에 그런 건 없어.”

 

 정말 인정사정없네요. 열여섯 살한테 이기고 싶어요? 놀리는 것처럼 너는 혀를 쏙 내보이며 입 꼬리를 올렸다. 네가 손에 쥔 검은 색의 체스 말이 체스 판에 부딪혔다.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무겁지 않았다. 가볍게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체크 메이트.”

 

 네 얇은 목소리가 네 머리칼에 걸려 한 방울씩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다. 언제 판이 이렇게 바뀌었더라? 네 하얀 실내화 끝에 채도를 잃어가는 빛이 닿았다. 무거워진 빛이 닿았다. 네 얼굴이 그림자에 가렸다. 빛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너의 얼굴이 보이지가 않았다. 네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섰다.

 

“있잖아요.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혹시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 당신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잖아요.”

“그렇죠?”

 

 날카로운 마찰음이 우수수 떨어졌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으로 나무 말들이 추락했다. 일어선 너의 눈이 식었다. 갈빛이 그리도 차가울 온도를 보일 수가 있구나. 네가 일어나면서 밀쳐낸 작은 탁자가 기울었다. 올려다본 너의 표정은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네 인생을 망치고 있지.”

“너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럴 거야.”

“예나 지금이나.”

 

 너는 처음 봤을 때보다 잘 웃게 되었다. 처음에는 손인지 밴드인지 싶을 정도로 상처를 내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래도 전문가 태가 난다고 할 정도로 일도 잘 따라가고 있었다. 학교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며 싸워댈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누가 말 하나 하지 않아도 아침이 되면 조용히 현관을 나갔다.

 눈이 부셨다. 그에 신경질적으로 팔로 눈가를 문질렀다. 까끌까끌한 옷의 감촉이 시원하기는커녕 따가웠다.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부은 것 마냥 쓰라렸다.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일어서자 네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짧아진 머리카락, 조금 더 높아진 눈높이, 조금 더 무거워진 눈빛이 눈에 띄었다. 지금의 너였다.

 

“많이 자랐네.”

 

 그 말에 그저 웃어 보이는 네가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가 아닌 두려웠다. 너는 성장하는구나. 너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너는 몇 년 전에 머물러있는 내가 아니었다. 너는 조금씩 더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이 다음에 결국에는 알게 되겠지. 내가 했던 일들도, 왜 그들이 너를 내게 맡기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는지도. 그러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대답은 없다. 그림자와 다름없는 네가 진짜 너의 대답을 말해줄 것은 만무하니. 설령 말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네 의지가 아닌 나의 어리광일 것이다. 너한테 날 무정히 내치지 말아달라고 전하고 싶었던 내 제멋대로인 행동. 너는 그 작은 입술을 열고는 푸스스 웃었다.

 

“나는, 당신을 두고 갈 거야.”

“응, 알고 있어.”

 

 보잘 것 없는 여자아이. 어딘가 특출나게 잘 하는 것도 없고, 무엇이 특별하지도 않았다. 너는 말 그대로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다행이야. 잘하는 것에는 결핍이 뒤따른다. 무엇이든 그래. 하지만 너는 특별하지 않으니 부족한 것 또한 없었다. 네 인생에서 내가 사라진다한들 무엇이 문제될까. 나와 보낸 시간이 네 팔목을 잡아 시퍼런 멍이 들 것이다. 그것은 분명 네게 쓰라리겠지만. …너는 곧 그것을 잊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품 안에서 금방은 아닐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런 네가 부러웠던 거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기대고 숨길 것 하나 없는 사람. 같이 있던 시간에 비해 넌 나와 너무나도 반대였다. 옷이 더러워지면 누군가 털어줄 것이다. 네가 울면 누군가 괜찮다며 위로할 것이며, 일어서는 그 팔을 잡아줄 일이었다.

 

“다행이다. 넌 약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누구한테라도 기댈 수 있는 약하고,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계집아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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