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꿈을 꿨다. 땅과 부딪히며 우드드득, 소리가 나려는 찰나에 또 눈을 떴다. 매일 같은 꿈을 꾸는 바람에 언제 미쳐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아, 기분 나빠. 그렇게 읊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초췌하다. 다른 때보다 더 꿈이 선명한 탓이려나? 잘 모르겠다. 어쩐지 오늘은 꿈속의 내가 땅에 처박히기 직전 본, 이미 떨어져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 채 미동조차 없는 너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내가 이러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그 꿈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뉘었다. 떨어지는 너를 뒤따라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지는 경우와, 얼굴에 조소를 띤 네가 나를 밀어 떨어뜨리는 경우. 어떤 경우든 결국 나는 창밖으로 한없이 한참을 떨어지다, 땅에 그대로 충돌하려는 순간 꿈에서 깨곤 했다. 네가 나를 밀어내는 경우는, 실제로도 네가 나를 거부했던 날들에 꾸는 꿈이었다. 그 꿈은 내가 스스로 떨어지는 꿈보다 더 비참하고 생생하고 고통스러워서, 꿈에서 깨고 난 그 하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옥죄어 와 헐떡거리고, 눈 주위는 눈물자국들로 번진 채 퉁퉁 부어 일어난 나는 정말로 참담할 정도로 불쌍해보였다.
그럴 때마다 너를 만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후회를 한다. 너를 좋아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후회를 한다.
널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넌 말하자면 빛나는 아이였다. 반짝반짝,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아이. 모든 것이 완벽해 어딜 가나 사랑받는 아이. 그런 네게 관심이 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넌 내가 닿기엔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난 널 쳐다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평범한 나는 너에게 그저 친구로만 남았다. 처음에는 어색한 친구로 시작되었던 우리 둘의 관계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내 마음을 억누른 노력 덕분인지, 우리는 꽤나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 또한 너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됐던 호감이 차차 정리되었고, 겉모습은 물론 속마음까지 너를 친구로 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그 사이 너무나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더 이상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는 네가 아닌,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막역한 사이가 되면서 너에 대한 마음도 사라져가는 듯 했다.─아니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너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나의 죽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늘 장난기 많던 네가 진지하게 변하는 모습이나, 내가 정색을 하면 미안하다며 곧바로 사과하며 쩔쩔매는 모습이나, 문득문득 무심코 닿는 너와의 스킨십에 설레게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귀는 항상 너를 향해 열려 있었고, 내 대화 주제는 항상 너로 끝났고, 내 시선 끝에는 항상 네가 있었다. 나는 너의 주위를 맴돌게 되었다. 너를 좋아하게 되었다. 너를 보면 비싯비싯 바보처럼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고, 두 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그레한 핑크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넌 내게 그런 존재였다. 너는 내게 항상 설렘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내 눈에 비치는 널 보면 항상 행복해졌다. 누가 봐도 널 좋아한다는 것이 티 날 정도로 요란한 짝사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너의 모습에 막연히 가진 호감이 아니라, 너의 진짜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그런 사랑이었다. 친구들이 너무 친한 우릴 보고 '너희 사귀냐'라고 놀릴 때에도, 짐짓 싫은 척 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날들이었다.
아마 너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나의 마음을.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사랑은 분명 외사랑이었다. 상대가 알고 있는 짝사랑. 너무나도 슬픈 짝사랑.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흘렀다.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내 마음조차 주체하지 못하고 너에게 고백해 버린 것, 하나. 너는 당연히 나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부여잡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해서 미안해. 그래도 알아줬으면 했어. 깔끔히 정리할게. 친구처럼 지내자. 너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의 그 애매한 긍정에 난 기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창문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 널 향해 수줍게 웃는 나를, 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밀어 떨어뜨리는 그런 꿈. 일어나니 땀범벅, 눈물범벅이었다.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후 너와 나의 관계는 예전과 같았지만, 같지 않았다. 별반 달라질 게 없어보였지만, 나는 안다. 너와 나의 관계는 어딘가 어그러져 있었음을. 그 이유가 나의 어설픈 고백 때문이었음을. 그리고 그 뒤부터 나는 항상 같은 꿈을 꿨다. 물론 그 때부터는 꿈이 조금 바뀌어 웃는 얼굴로 네가 나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떨어지는 너의 뒷모습을 따라 나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그런 꿈을 꾸었다. 아마 널 쫓고 싶다는, 잡고 싶다는 무의식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후회하는 것. 관계가 엇나가기 시작한 걸 알면서도 계속 연락한 것, 하나. 너와 나는 분명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마음을 정리한다면, 금방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연락하는 내가 불편하다고, 집착하는 것 같다고, 너는 점점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고, 서서히 연락 빈도를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때 너와의 연락을 단번에 끊었다면, 우린 뭔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소극적이었던 내게 넌 다시 한 번 화를 냈고, 나를 매몰차게 쳐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또 다시 꿈을 꾸었다. 네가 나를 웃는 얼굴로, 희열에 찬 얼굴로,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꿈. 난 떨어지면서도 네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의 웃음이 참 예뻤다. 꿈에서 깨면 가슴이 답답하고 실제로도 죽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너의 그 매력적인 웃음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또 후회하는 것. 너의 소식을 알게 된 것, 하나. 그 일이 있고 나서 다행히 3학년 때의 너와 나는 다른 반이 되었다. 너와 나는 그저 각자의 목표를 위해 입시 준비를 했다. 사실 그 1년간은 너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듣지 않으려고 한 것도 있었다. 만약 그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내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으므로.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대학발표가 다 나고, 등록까지 마치고 난 후의 졸업식 날이었다. 사실 너와 끝나게 된다고, 이제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안심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우울함이 몰려왔다. 이대로 끝이구나. 정말로 끝이구나. 그렇게 졸업식을 끝내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얘기를 나눴다.
너 A대에 간다며?
맞아.
거기 그 과 경쟁률 엄청나던데,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그 대학 간 애 몇 명 있지 않아?
나 말고 또 있어?
그 애 있잖아, J. A대 간 게 맞나? 사실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너도 그 대학이라고? 나와 같은 학교? 너와 다른 학교로 갈릴 거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 아니 날 괴롭히는 것은 네가 아니다. 널 좋아하는 내 자신이다. 그날 밤 넌 또 나의 꿈에 나왔다. 그 날 너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날 잡아봐."
그리고선 너는 또 다시 창밖으로 추락했다. 널 따라 몸을 던지는 내게 넌 입모양으로 말했다.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너와 내가 같은 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학을 다닌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불행인지 다행인지 널 마주친 적은 없었다. 네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 번도 화장을 거른 적이 없었다. 1교시가 있는 날도, 전날 밤을 꼬박 새도, 술을 진탕 마셔 필름이 끊긴 다음날도, 난 항상 풀메이크업에 내 기준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그 때문인지 술에 엄청 취해도 다음날을 위해 클렌징을 하고 샤워를 꼭 하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 이유는 혹시 모를 너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친구의 말처럼 네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을까봐, 우연히 널 만날까봐. 사실 수소문해서라도 네가 어디 대학을 다니는지, 이 학교에 있는 건 맞는지, 네가 아주 예전에 얘기하던 원하는 학과에 입학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걸 네가 알게 되면 집착이라 생각할 것만 같아서, 아무리 내가 생각해 봐도 집착이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 관뒀다. 그냥 네가 이 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이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만큼 너는 이곳에 있다고 자만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캠퍼스에서 우연히 널 마주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 나는 매일의 나 자신을 포장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기를, 지나가다 네가 변한 날 보고 놀라기를, 고등학교 친구들도 순간 알아보지 못하게 변한 날 보고 한 번 쳐다봐주기를, 그런 작은 기적들을 바랄 뿐이었다.
매일매일 너를 따라 창밖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가쁜 숨을 내쉬며 겁에 질려 일어나고, 어떤 향수를 뿌릴까, 어떤 화장품을 쓸까, 어떤 옷을 입을까 반복하며 그 날의 꿈을 잊으려는 노력들이 반복되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본 졸업식으로부터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내가 널 좋아한 3년이란 시간을 지우기엔 너무나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네가 보고 싶었다. 항상 네 생각이 많이 났다.
있잖아, 만약, 정말 만약에 너와 내가 마주친다면, 한 번만 쳐다봐줘. 그 잠시의 순간을 위한 매일의 내 노력을 몰라줘도 되니까 넌 그냥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짧은 시선 한 번 던져주고 날 스쳐 지나가줘. 난 그만큼 아직도 네가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만 하길 몇 개월, 계속해서 일 년이 넘도록 끊이지 않는 같은 꿈에 미쳐가기 직전, 신기하게도 너를 지하철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다른 날들과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오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일찍 준비를 마치고 일찍 집을 나섰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지하철 맨 앞 칸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너희 집 근처 역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리는 다 차버렸고, 사람들은 앉은 사람들 앞에 줄줄이 서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널 본 것은. 넌 내 대각선 앞에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며 서 있었다. 놀라서 한 번, 소름 돋게 닮았다고 생각해서 한 번, 너인 것을 알고 한 번 그렇게 너를 쳐다보다 황급히 시선을 깔기를 반복했다. 내 시선은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있으면서도 모든 신경은 네 쪽으로 향했다. 다음 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는 척 너를 힐끔힐끔 거리기도 했다.
너는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알아보지 못한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시선은 계속 작은 핸드폰 속이었다. 그렇게 계속 너를 힐끗거리던 도중, 너와 난 눈이 마주쳤다.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인식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는 그냥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다시 핸드폰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종점역에 내려 환승하려할 때, 일부러 너의 한걸음 뒤에 섰다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아침의 환승역이라 인파에 휩쓸려 순간 너를 놓쳤다. 너는 지하철을 타고자 하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로 밀려밀려 그렇게 사라졌다. 또 다시 겪은 너의 밀어냄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난 또 꿈을 꿨다. 너는 생긋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아니, 조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넌 못 해."
그렇게 나는 너에게 밀려 또 다시 창밖으로 계속, 계속, 떨어지고, 낙하하고, 추락했다.
숨이 막혀와 답답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꾸는, 네가 밀어 나를 떨어뜨리는 꿈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꿈에서 깬 지금의 현실 감각이 너무도 부족하다. 아아, 나 살아있기는 한 건가?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꿈속의 꿈인가? 사실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 네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다. 아니 지금 창밖으로 떨어지는 네가 보이는 것 같다. 현실인가? 꿈인가? 잡아봐. 네가 내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 내가 널 못 잡을 것 같지? 난 할 수 있어. 널 잡을 수 있어. 네가 추락해 꺾여버리기 전에, 내가 널 잡을게. 조금만 기다려.
창밖의 공기가, 차갑다. 마치 현실처럼.
미련의 끝에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