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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이 있다.

 

창문에 집착하는.

 

그렇다면 수많은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무언갈 끊임없이 찾고 모으느냐. 그건 아니다. 그냥 집착이다. 말 그대로 집착. 말 그대로의 집착은 무엇일까, 사실 나도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안다. 언제나처럼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추상적인 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가 마치 무슨 대단한 존재인양, 심오한 양, 철학적인 양 이야기하는, 그런 거만하고 독자까지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화자를 싫어한다. 그래서 첫 문장만 읽고 덮어버린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마치 그 책들과 같아서 스스로에 대한 혐오만 늘어난다.

 

 

아니, 아니지,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무튼, 우편을 수집하듯, 유명인의 정보에 집착해 금지된 문을 열 듯, 그런 짓 따위 하지 않는다. 그냥 집착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아아, 그냥, 너무 깊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썩어버릴 습관이. 또 생각에 생각을 낳아버리고 있다. 지금 내가 뭐라는 거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실은 나 스스로도 알고 싶지 않다. 이 집착에 대해. 사실 이미 무의식에서는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지금까지 이유도 모르고 창문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창문, 창문.

 

내 집착은 특이하게도(또는 다행이게도) 밖으로 보이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아니다. 다만 내 가슴 깊숙이, 그 어떤 깊고도 깊고도 어두운 그런 곳에 자리한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무의식의 세계, 즉, 우리가 "꿈"이라 일컫는 그 상태에 들어가면, 창문을 마주한다. 그리고 어떤 알 수 없는 강박에 의해 질질 온몸이 끌려가, 그대로 뛰어내려진다.

 

 

 

    문

 

        밖

 

   으

 

로.

 

 

왜 그럴까, 라는 고민을 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 지났다. 이미 그런 꿈을 꾼 지 몇 년이 됐는지 헤아리는 것조차 놓칠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오랫동안. 그 속을 헤매고 허우적댔다. 그래서 너무도 익숙해서 이 창문의 존재에 일말의 의문조차 품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창문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무의식이라지 않나.

 

 

아무튼.

 

아, 생각났다.

 

 

"하나 생각난 게 있어요. 그 창문이라는 거랑 관련해서. 꿈에서의 그 끔찍한 창문과 똑같은, 그 창문. 너무 흔한 나무 격자 창문이지만 나는 기억해요. 그건, 이사 가기 전 우리 집 창문인 것 같아요. 난 그 창문의 작은 금까지도 전부 기억하거든요. 그래, 진짜 그러네! 왜 이제까지 몰랐지? 너무 뻔하고 당연하게 그건 그 창문이에요! 기억하세요? 그 집은 아파트로 치면 4~5층 될 거에요. 전원주택에 2층이 제 방이었잖아요! 그 창문은 우리 집에서도 제 방 창문이에요. 잊을 수 없죠. 저는 쓸데없고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는 특기가 있거든요, 아실 진 모르겠지만."

 

 

"……."

 

 

“음. 우리 집은 정말 화목한 집으로 인식됐었어요.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하고는 했어요. 쟤네 집은 정말 화목하다고요. 아무래도 부모님께 존댓말을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웃음이 많아서 그랬던 것도 있을 거고요. 존댓말을 한다고 부모님께 예의바른 것도, 겉으로 화기애애해 보인다고 진짜로 화목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땐 다들 어리긴 어렸었나봐요.”

 

 

"……."

 

 

"그 때 그 창문이랑 관련된 거면 역시, 이것밖에 기억나질 않네요. 동생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갑자기 왜 동생이 창문 앞에 있는 건지… 아무튼, 제 머릿속에서의 동생은 뭔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요. 팔 하나를 들어 이마 쪽에 갖다 대고 있네요. 몸은 전체적으로 살짝 굽힌 것 같아요. 뭐지, 이게..."

 

 

"……."

 

 

…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울렁임이 내 위장을 헤집어놓는다. 분명 어젯밤 처음 동생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때는 별 문제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서 머릿속 이미지를 말로 내뱉는 순간부터 역겨움이 가득 올라온다. 뭐지? 왜 아직 제대로 알아낸 것도 없는데 벌써 잘못된 것 같지? 왜?

 

 

아냐. 다시 집중하자. 제발 대화에, 아니 독백에, 집중해.

 

 

저 창문이 나를 끌어당긴다. 알 수 없다. 눈 뜨고 있을 땐 생각조차 잘 안 나는 저 창문이, 눈만 감으면 나에게 집착하며 나를 옭아맨다. 나는 왜, 매일 밤,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저기로 끌려가나. 자는 동안 내 몸은 나의 것이 못 된다. 나는 내 몸의 제어권을 잃어버린다. 자꾸만 저, 저 못된 창문이 내 몸뚱아리를 질질 끌고 간다. 그렇게 섬뜩함에 눈을 뜨면 다시 나는 열린 창문 앞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겠지.

 

 

아아, 역시 아까의 울렁임이 전혀 가라앉지 않아! 내 온몸이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어. 내 몸의 세포들이 지금 이 장소와 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어. 이유도 모른 채 속이 뒤집어진다.

 

 

-나가야만 해!

 

 

“죄송해요, 그냥 쓸데없는 잡념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스트레스 받거나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오늘은 그냥 일찍 갈게요.”

 

 

“…가?”

 

 

“네, 꼭 밥 잘 챙겨 드시고요! 전 그럼 진짜 갈게요.”

 

 

“…어엉.”

 

 

바람 때문에 잘 열리지도 않는 현관문을 온 힘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벌컥 열고, 쿵-하는 묵직한 철제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의 미세먼지 섞인 공기를 한 숨 깊이 들이마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뭔가 큰 응어리가-아까 느꼈던 그 불안감과 잘못됐다는 느낌의 응어리들이- 쑥 내려간 기분이다.

 

 

뭔가 이대로 창문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창문 뒤에 가려진 무언가에 대해서 충분히 나는 알아낼 수 있음을 느끼고, 또 알아야만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알게 되면, 내 마음이 갈가리 찢길 것이라는 것도 대충 직감하고 있다. 나는 사실 어느 순간부터, 이 창문이란 것이 내 무의식까지 침입해 내가 잊으려 했고 결국 잊었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알려주려고, 수 년 전부터 소리치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외면해왔고,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그냥 창문 꿈을 꾸면 느껴지는 섬뜩함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창문으로 질질 몸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갑자기 섬뜩함이 느껴져 눈을 뜨면, 그곳은 내 침대 위가 아닌, 내 방 창문이다. 그나마 창문이 보이면 다행이다. 가끔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아버리게 될 때가 있는데, 그건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 우리 아파트 밖의 나무들과 놀이터일 때다. 내 몸이 창문에 걸쳐져 있는 것이다. 머리는 창밖으로 내밀어진 채.

 

 

걷는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끝도 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대로 걸어서 도착한 곳. 자연스러운 물살이 아름다운 곳. 바닷바람은 아니지만 뭔가 서울의 냄새를 품은 듯 그런 냄새가 느껴지는 강바람이 부는 곳. 그런 바람 가운데서 한없이 자유롭고 공기의 흐름들 사이에서 나 혼자 멋대로 나부낄 수 있는 곳. 한강이다.

 

 

달칵.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

 

 

“다름이 아니라 상담을 받고 싶어서요. 여기서 해도 되는 거죠?”

 

 

“네, 어떤 상담을 말씀하시는…”

 

 

“인생 상담이요.”

 

 

“아, 네에…”

 

 

“제가 요즘 창문 꿈을 꿔요.”

 

 

“창문..이요?”

 

 

“네. 미쳤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창문을 보고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창문으로 질질 끌려가는 꿈을 꿔요.”

 

 

“……네.”

 

 

“그리고선, 창문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순간 섬칫하죠. 그렇게 눈을 뜨면, 실제로 제가 자던 곳에서 벗어나 제 몸이 창문에 아슬하게 걸쳐져 있어요.”

 

 

“어머. 너무 위험한데요.”

 

 

“그런데 이 꿈이 벌써 몇 년째인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래됐어요.”

 

 

“대충 몇 년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못해도 오륙 년 이상은 된다는 건 확실해요. 그 때쯤에 제가 병원에 가서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그 꿈 때문에 또 제가 침대에서 일어나서 창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나 봐요. 근데 그 때 침대랑 창문 사이에 짐 같은 걸 갖다 놓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다쳤었거든요.”

 

 

“아아. 그럼 상당한 세월동안 그 꿈에 시달리셨네요.”

 

 

“네.”

 

 

“꿈이란 무의식의 반영이니 무언가 창문과 관련된 트라우마나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도 무의식과 현실의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긴 했었어요.그런데 연관성을 찾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어서… 그나마 입 밖으로 창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렴풋한 분위기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이 전화를 쓰게 됐어요. 혹시 이게 업무에 방해가 될까요?”

 

 

“아니요, 절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저희의 업무입니다. 부담 없이 편하게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음, 그러면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해볼게요. 듣다가 지루하시면 전화를 내려놓고 다른 일 보셔도 좋고요, 아니면 이만 끊겠다고 말씀하셔도 돼요."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세요."

 

 

"저는 남동생이 있어요. 어릴 땐 참 아프고 약했었는데, 제법 든든하게 자랐어요. 바보 같을 때도 있지만, 의외로 속이 깊어요. 그런데 동생이 뭔가를 자꾸 숨기더라고요. 속이 깊은 아이라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제가 답을 스스로 찾아내지 않는 한 뭘 숨기는지 절대 답을 못 들을 갓 같았어요. 이게 또 마음에 걸리는 게, 제가 창문 꿈을 꿀 때, 항상 깨면서 동시에 잊는 어느 부분이 있어요. 깨고 나면 창문과 섬뜩함 밖에 못 기억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서가 잊혀져 있어요. 이걸 찾고 싶었서 부단히 노력했어요. 그리고 여기에 전화 걸기 얼마 전, 우연히 떠올린 이미지가 바로 동생이었어요."

 

 

"……"

 

 

"동생과 관련된 어렴풋한 기억 중에, 꿈속의 그 창문과 관련된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동생은 창문 근처에서 손 하나를 이마에 갖다 대고 있었고, 몸은, 몸은……”

 

 

“…몸은요?”

 

 

“아, 네. 방금 새로운 이미지가 떠올라서요. 아까 떠올렸을 때랑은 다른 모습인데요 지금 생각난 동생의 모습은 창문 근처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뭔가 이게 모양이 이상해요. 바닥에 있는데,”

 

 

“네,”

 

 

“뭔가 엉거주춤하고 부자연스럽게 있어요.”

 

 

“…….”

 

 

…이게 무슨 모습일까. 바닥에 엎드려서, 눈을 감고,

 

 

"……여보세요?"

 

 

얼굴에는 붉은 무언가가 있다.

 

 

"여보세요? 괜찮으신가요?"

 

 

동생의 얼굴엔, 피가 한바탕이다. 이게 뭐야? 왜? 동생은 왜 쓰러진 거야?

 

 

덜컥.

 

 

전화기를 던지듯 내려놔버렸다.

 

 

울렁인다. 갑자기 물밀 듯 치고 들어오는 수많은 악몽같은 기억의 파도가, 내 머릿속을, 내 뇌의 주름 사이 사이를 휩쓸며 헤집고 뒤틀어버린다.

 

 

-토할 것 같아.

 

 

그대로 나는 후들거리며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미끄러져 내려가 주저앉았다. 띄엄띄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파편들이 날아와 나에게 사정없이 박힌다.

 

 

동생, 피, 깨진 온갖 물건들, 가구 위치가 전부 조금씩 틀어져 있는 내 방, 유리병, 한 남자, 고함, 그리고 그걸 전부 바라보고 있는 나.

 

 

-맙소사.

 

 

아까, 나는 치매에 걸린 한때 아빠라고 부르던 인간에게 갔다. 말도 잘 하지 못하는 그 사람 앞에서, 내가 하필 그 인간 앞에서, 대답도 듣지 못할 대화를 시도하며 고민 상담 비슷한 것이랄 것을 한 것에는 내 잔인한 무의식의 힘이 작용한 것일까. 내가 방금 본 동생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내 방 창문 근처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생의 모습이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동생이 숨기고자 했던 그 무엇과 갑자기 연결되는 너무도 많은 것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 같은 정보가, 하지만 사실 알고 있어어만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동생의 몸에는 큰 흉터가 하나 있다. 이제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동생의 머리통 어딘가에는 머리카락으로 숨기고 있는 수술자국이 있다. 나는 왜 그 상처가 생겼는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 정말 미안해했다. 하지만 사실 미안해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버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또한 그 때 병원 신세였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이 쓰러지고 거의 직후, 의식을 잃었고 오랜 기간 무의식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동생의 수술과 회복은 그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었고, 나는 약 두 달 간 병원에 있었다. 하나가 생각나니 모든 것이 줄줄이 기억난다.

 

 

꿈에서 생략된 것은 어질러진 방과 쓰러진 동생, 그리고 울부짖는 나. 아빠는 가족들에게 온갖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가장 폭력이 심했는데, 사람이라면 할 수 없을 폭력과 폭언을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일삼았다고 한다. 엄마를 함부로 대하던 그는 우리에게도 간간히 폭력과 폭언을 저질렀지만, 어릴 때는 꼴에 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친절한 척, 보기 드문 좋은 아빠인 척, 나름대로 코스프레하며 지냈다. 하지만 나는 필요 이상으로 똑똑했고 눈치가 빨랐다. 그것이 내 잘못이었다면 잘못이었다. 결국 "아빠"의 실체는 까발려졌다. 나에 의해서. 나는 아빠에게 할 말을 다 했다. 엄마처럼 말을 아끼거나 숨어서 울지 않았다. 앞에서 소리 지르고 같이 발악하고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하며 얼마나 당신이 잘못되고 한심한지를 낱낱이 알려줬다. 그러자 나에게 모든 폭력이 돌아갔다. 눈이 돌아가는 그 인간을 보며, 그래도 나는 최소한 그와는 다르게 교양과 평화주의를 지키겠다고 정당방위를 제외한 폭력은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엄마 몫의 폭력을 내가 조금이나마 덜어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폭력 덕분에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나는 남들보다 강하게 자랐다. 마음은 곪았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동생은 나와 엄마를 너무 사랑했다. 폭력이 있을 때마다 동생은 그 남자의 폭력에 뛰어들어 몸으로 막으려 들었다. 나는 하지 말라 했지만, 유난히 폭력이 평소보다 심했던 그 날 밤 내 방에서, 동생은 그만 그 남자가 휘두르고 내던지던 물건에 머리를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절규하면서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폭력을 쓰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지만, 동생의 모습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저 정신 나간 인간이 쓰러진 동생을 더 이상 건들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달려들었고, 결국 나는 날뛰는 그 사람의 손에 의식을 잃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차츰차츰 맞추어지며 고통이 알 수 없는 형상을 하고선 내 마음을 잠식한다. 아무래도 나는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을 조각조각 잃었었나보구나. 아, 아니야. 사실 난 알고 있던 거야. 다 알고 있었는데, 스스로 지웠던 거야.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바보 같고 미련스럽겠지만 욕심이 있어서.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일부러 사고와 관련된 기억만 내가 지워버린거야. 스스로를 속이며. 하지만 내 욕심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하게 길고도 길었던 시간동안의 아픔은 창문의 형태로 내게 넌 잊어서는 안 된다고, 기억해야한다고, 말해왔던 거야.

 

 

이제야 오전에 그 징그러운 집 안에서, 이제는 홀로 남은 그 한때 아빠라 불리던 사람이, 내 이야기를 치매를 명분으로 모르는 척 가만히 듣던 것이 소름끼치고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이제야 엄마와 동생과 내가 왜 어느 순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 이후로 아빠라던 사람과 따로 떨어져 살고 있었는지가 이해가 된다. 왜 동생이 상처투성이인 눈으로 내게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고 거짓말했는지, 왜 엄마가 자꾸만 나를 이유 없이 종종 안아주곤 했는지, 이제야, 이제야. 알 것 같아. 한강을 숨이 턱 막히도록 뛰어서 나온다. 한강에서 뛰어서 10분 거리에는 악마로부터 벗어나 오순도순 세 식구가 함께 사는 보금자리가 있다. 미친 듯이 뛴다. 현관에 이르러 문을 빠르게 열고 뛰어 들어간다. 눈 앞에 보이는 동생 방문을 그대로 벌컥 열고 들어간다. 동생을 숨 막힐 정도로 안아주며 엉엉 대성통곡을 한다. 동생이 묻는다. 왜 그래, 누나. 네가 왜 자꾸 나한테 그 흉터 얘기 안했는지, 못난 누나라서 이제 알았다고 얘기해준다. 동생이 창백해진다. 누나, 무슨 말이야. 나 다 기억한다고. 나, 수년간 기억 못하고 머리 아파하던 그 창문에 대한 거, 다 기억해냈다고. 그 창문, 우리가 전에 끔찍하게 생각했던 집 창문이었어. 네가 쓰러졌었다고 꿈에서. 이제 다 기억났어. 누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기억이 다 났다는 거야? 응. 진짜로? 응, 진짜로. 다 기억났어. 결국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 울기 싫은데. 울면 내가 너무 바보 같잖아. 듬직한 누나여야 하는데. 왜 같이 울고 자빠졌냐. 그래도 좋다. 다 알고 우는 지금이 좋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어느새 보니 내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동생이 손을 잡아준다. 고마워. 그렇게 감정을 간신히 추슬렀다.

 

 

잠시 후, 장 보러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세 식구가 다함께 저녁을 먹는다. 조심스럽게 나와 동생이 내 기억에 대해 말을 꺼낸다. 결국 셋이서 울다 웃다 밥을 코로 먹었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 셋 다 아팠는데, 아직도 아픈데, 내가 기억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전보다 희망이 생긴 기분이다. 끔찍한 아픔이라 일부러 나에게 사실을 숨겼겠지만, 나 스스로 그 아픈 기억을 잃어버리길 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사실대로 말해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 기억을 되찾자 우리 가족은 전보다 더 웃기 시작했다. 남들은 비웃을지도 몰라. 스스로 묻었던 기억 되찾은 게 웃을 일이냐고. 실제로 뭐가 바뀐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응, 이건 웃을 일이야. 행복해해야 할 일이야. 스스로 되찾은 기억. 수년 만에 되찾은 기억. 이건 내 마음이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는 거야. 내가 마침내 내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이제라도 가졌다는 뜻이야. 내가 내 아픔의 민낯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드디어 단단해졌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영원할 것만 같던, 미칠 것 같은 창문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았다. 여느 때처럼 불을 끄고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빼꼼 내밀고 눈을 감았다. 또다시 나는 창문 꿈을 꿀 거야. 괜찮아. 이젠 이 꿈도 오늘부로 안녕인걸.

 

 

아아, 창문이 보인다. 저 지긋지긋한 창문. 이제야 안개가 걷힌 듯 들린다. 저기 내 뒤에서 아빠라던 남자가 고함을 지르는 것이. 귀가 찢어질 것 같은데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 남자의 손에는 유리병이 들려 있다. 부서져 있어서 맞으면 아무리 못해도 어딘가 찢길 것 같다. 동생이 큰 소리로 안 된다고 외치며 나와 남자 사이를 막으려고 한다. 나는 예상한 듯, 동생을 감싸 안으며 괜찮아, 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 인간의 손을 떠난 유리병이 우리를 맞히기 전에, 동생과 함께 창문을 향해 그대로 달려간다.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들이 거울처럼 빛을 사방팔방으로 비춘다. 아름답고 고요하다.

 

 

사실 꿈속에서 수도 없이 창문을 보면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어. 저 창문이 현실과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저 밖은 물이야. 푸르른 물. 유순한 고래가 살고 귀여운 돌고래들이 숨 쉬는 깊고 푸른 바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게 확신하는데, 저 물에는 빠져도 괜찮아. 창밖으로 떨어져 빠진대도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익사하지 않아. 동생에게 다 괜찮아, 라고 속삭여준다. 온갖 상스러운 문자들과 고함들을 뒤로 한 채, 나와 동생은 정적 속에서 공기를 가르며 파랑을 향해 떨어져내린다.

 

 

그리고 약속한 듯, 나와 동생은 고개를 들어 같은 곳을 본다. 처음으로 알았다. 떨어지면서 바라본 그곳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솜사탕같은 분홍빛 하늘과 몽글몽글 떠 있는 하이얀 구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본 풍경이었다. 나와 동생 모두.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물에 빠지기도 전에, 모든 장면과 모든 배경들이 사라지고, 나와 동생마저 사라지고, 오직 무(無)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매일 밤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꿈을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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