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걷는다. 어제도, 그저께도. 몇 번이고 마주했던 이 길은 언제나 현실로 나아가면 눈처럼 녹아 사라진다. 그리곤 다시. 현실을 벗어나 꿈을 꿀 때면 그 때의 기억과 함께 가슴에 새겨지듯 다시 나타난다. 마치. 내가 꿈꾸는 바람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도, 결코 닿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듯.
_Write by Lua
벚꽃이 만개하여 흐드러지고, 그 아래. 자신만의 온화한 색채를 지닌 꽃들이 아름드리 펼쳐져있는 이 길. 나는 결코 입지 못할 화려한 난색의 옷을 입고, 저 멀리서 보이는 웃고 있는 당신에게로 다가간다. 처음에는 느리던 것이, 걸음을 달리할수록 그 박을 늘려가고. 기어이는 긴 옷자락을 흩날리며 당신을 향해 뛰어간다. 익숙하다는 듯 팔을 벌려 안아주는 당신의 품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나는 웃는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끌어안은 듯.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서로를 향해 웃음을 터뜨린다.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손을 잡는다.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긴다. 여느 때와 같이. 저 밝고도 아름다운 태양빛 아래에서. 결국, 현실의 나는 그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세계에서 내몰린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닿을 듯 아른거리는 저곳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저건... 어디까지나 꿈이니까.
‘꿈’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세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바닥을 메우던 수많은 꽃들이 깊은,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세상을 비추던 빛은 금이 가, 수많은 별의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춘다. 그러고 나면 세상을 가득 메운 어둠이 내게로 손을 뻗는다. 지독한 수마와 함께 길은 무너진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
.
.
“아...”
또다. 무언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느낌. 지독한 슬픔, 허무감, 그리고 고독. 제 아무리 가슴을 두드려도 나아지지 않는 통증, 통증, 통증. 결국엔 그 상처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간이 얼마 없어.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아리따운 공주님을 만나기 위해. 문득, 거울 앞을 내 모습의 끝자락에 어여쁜 옷이 스쳤던 것도 같다. 아니, 아니지. 내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까. 오늘의 시계도 흐른다. 바로 뒤까지 따라온 사신의 칼날이 시리다.
“공주님. 가셔야죠.”
화사한 금발의 햇살을 닮은 여인, 자신의 주인인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다.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를 갖추어 입은 그녀의 손을 잡는다. 조심히, 조심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연을 맺는 순간이기에. 망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는 심장을 고요히 억누른다. 언젠가 자신이 좋아했던 왕자님을 향해 자신의 하나뿐인 공주님을 이끌었다.
황혼의 마지막 장은 “그들은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선택받은 이들만이 그런 행복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고, 그마저도 깨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세계에서 공주님은, 행복으로 물든 점을 찍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신의 낫이 목을 베기 시작했다.
황혼의 끝자락. 저문 해의 마지막 일면. 나만의 작은 세계에 자리 잡은 지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펜이 서서히 느려진다. 마지막 한 줄. 그 이야기가 채워진다.
“후회는?”
낯선? 아니, 익숙한. 물 밀 듯 밀려오는 꿈의 파편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나에게 준 마지막 배려였던 걸까. 나지막히 내뱉은 말이 허공을 떠돈다. 바로 옆에 자리한 나를 바라보곤 다시,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저 하늘을 바라다본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그 한 마디에 또 다른 내가 웃었다. 그렇지. 후회하지 않는 인간은 없어.
“그래도, 가장 아쉬운 건 있을 거 아니야?”
“잘 모르겠네... 이제는 다 희미해져서.”
정말로, 답답하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정리를 한다는 건 이런 의미일까. 고개를 기울이다 내저었다.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내 인생이 힘들었다고 해도, 불행했다고 해도. 당장에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살아있었기에 괴로워했을 뿐. 이렇게 마주하니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있었기에 괴로웠던 게 아닐까. 그 생각을 읽은 듯 나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르니까. 너는, 그렇기에 너로써 반짝이는 거지.”
낯간지러운 말. 그렇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것에서 위안을 얻었다. 아,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가장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 시간은 어느덧 저물어 빛이 온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수고했어. 이 삶, 힘들었을 텐데도 잘 견뎌줘서. 모두가 그렇듯, 이제는 편안해질 수 있기를.”
사신이란 족속들은 참 취향이 이상해서. 낫이 완전히 목을 베어냈다. 스러지는 시야 너머로 마지막 태양이 보이는 듯했다. 길고 길던 이야기의 마지막 한 줄, 마지막 마침표.
‘어두웠기에 편안했던 마지막 밤이, 마지막 꿈이. 또 다시 찾아올 여명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